/ 재단소식 / 지난사업 / 문화다양성
  
 
첫 순서로 강원대학교 한건수 교수님께서 문화다양성은 무엇이며 , 타문화를 어떤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

문화다양성의 개념 , 현황 , 흐름에 대한 강의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실무자들의 시각을 넓혀주는 시간이었답니다 .


두 번째
순서는 연세대학교 김현미 교수님께서 문화다양성 학습방법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

현지에 가서 무엇을 ,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열띤 강연을 통해 여행객의 입장도 아닌 , 현지인의 입장도 아닌 .. 실무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연수에 참여해야 하는지 가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
각 팀별로 나뉘어져 각 국가의 문화 , 생활습관 , 특성 등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몽골은 이평래 선생님께서 , 베트남은 채수홍 교수님 ( 전북대 ) 께서 , 인도네시아는 김형준 교수님 ( 강원대 ) 께서 자세한 현지사정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며 , 연수팀원들이 주로 봐야 할 것들과 체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

직접 현지에서 수년간 살면서 연구하셨던 교수님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 여행 가이드 북이나 현지문화에 대한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숨겨진 1% 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
몽골팀, 베트남팀, 인도네시아팀 모이기!

지도와 책을 펼쳐놓고, 6박 7일 연수일정을 짜는 시간이었습니다.


(야호~ 베트남을 가보세~)


베트남팀의 일정짜는 모습을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북부 산악마을에 들어가서 홈스테이도 해봐야 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친정에 들러 선물과 딸의 소식도 전해 주어야 하고, 해변에 가서 휴식도 취해야 하고, NGO에 방문하여 베트남 현지상황도 들어봐야 하고, 호치민 묘지에도 가봐야 하고.. 구찌터널도 가봐야 하고..
교수님께서 달랏 시장에도 가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메콩델타 수상시장도 봐야 하고, 수상인형극도 봐야 하고..
도저히 6박 7일 일정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스케줄이 나와버렸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결과… 6박 9일 일정이 나왔는데…. 하루는 비행기 안에서, 하루는 기차 안에서 자는…
12시간 기차여행과 도보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연수팀의 열정!!!
저런 열정으로 밀어붙이다가 연수기간 중 병나시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되었답니다.
(샌밴노 몽골 ~~)

춥기전에 떠나야 하는데..
11월이 넘어가면 영하 10도가 넘는다는데..
연수팀간에 일정맞추기가 영 쉽지가 않네요.

몽골 노래도 한 번 배워보고
알뜽타우 압슨다~~

다시 연수일정을 맞춰보고…
우선 울란바타르에 가서 수흐바타르 광장을 둘러보고, 자이승 기념탑을 본 후
역사박물관도 가보고… 말도 타고, 낙타도 타고~~
한 번 가면 나오고 싶지 않다는 흡수골로 이동하여 별을 보며 게르에서 유목민 체험도 해보고~
가도가도 초원이라는 곳.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곳.
사방을 둘러봐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곳… ㅎㅎ

얼마나 가야 하는지, 지금 몇 시간이나 왔는지, 앞으로 몇 km나 몇 시간이나 더 가야하는지 묻다가 지치는 곳. 그곳으로 떠납니다.~

다시 울란바타르로 나와서 NGO에 가보고, 한국에 있는 몽골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궁금했던 것들도 물어보고, 귀환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가서 보고..

즐거운 6박 7일 연수일정 완성!
(아빠 까바르~ 떠나요! 인도네시아로~ )

모두 처음 가보는 생소한 곳이지만, 김형준 교수님의 상세한 설명으로
어디를 가야 할 지 쉽게 정할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팀!

우선 따만미니에 가서 쇼핑몰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는 말씀에 쇼자카르타에서는 쇼핑몰과 이슬람 사언을 본 후 족자카르타로 이동하여 보로부르드 사원과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술탄궁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귀환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 이해하고, 그들에게 더 도움을 주기 위해 먼저 실무자들이 그들의 문화와 삶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진행되는 이번 실무자 연수는
몽골팀 10월 31일, 베트남팀 11월 7일, 인도네시아팀 11월 21일에 연수활동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번 연수를 통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을 더~많이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더~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월 13일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9시경 호텔 문을 나선 우리 일행들은 먼저 호안끼엠 호수로 향했다. 호안끼엠 호수에서 발견되었다는 초대형 거북이가 전시되어 있는 옥산사당을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하노이 올드쿼터(구 시가지)에서 재래시장과 기념품가게 등에서 잠시 쇼핑을 즐긴 우리는 하노이에서 제일 큰 서점으로 향했다. 종이나 인쇄질이 좋지 않은 반면 책값은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었으며, 특히 외국에서 직수입된 책은 우리나라 시중가격보다 더 비쌀 정도였다. 젊은 층에게는 고전류 소설이 일반적으로 인기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호치민 묘지에 도착한 건 12시 30분경. 시신 방부처리 관계로 폐관 중인지라 아쉽게도 호치민 묘지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그저 밖에서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드넓은 광장 속에 우뚝 서있는 웅장한 묘지의 크기만으로도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오후 일정은 자유시간! 허성환 팀장과 나는 정수 씨와 만나 베트남식 개고기를 맛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전날 “개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정수 씨는 “진짜 먹을 수 있느냐? 베트남식 개고기는 한국이랑 틀린데... 그래도 먹겠느냐?”며 재차 확인했었다. 이미 지난 추석행사 때 베트남 친구들이 만든 개고기 요리를 맛본 나는 “먹어봤는데 괜찮더라. 이번에는 베트남 현지에서 만든 개고기 요리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오후 1시, 호치민 묘지에서 만난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하노이 북쪽 외곽에 있는 개고기집으로 향했다. 7~9가지 요리 중 개고기 수육, 개고기 순대, 개고기 튀김, 개고기 전골 등 모두 4가지 요리를 시킨 우리는 하나씩 시식을 시작했다. 사실 ‘현지판 개고기 맛이 이상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도 됐는데, 웬걸? 향이 특이한 야채와 새우젓 양념장이 곁들여진 개고기 요리는 맛만 좋았다. 특히 개고기 순대는 모든 부위의 살점을 골고루 섞어 만든 요리로써 제일 맛이 좋았고,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개고기 수육과 튀김, 전골 순으로 점수를 주고 싶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하노이 시내로 돌아온 우리들은 호안끼엠 호숫가 근처시장에서, 금년 송년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아시아전통의상발표회’에 사용할 베트남 남녀 전통의상과 전통악기 등을 구입하는 등 마지막 쇼핑을 함께 하였다.





오후 5시 30분경 헤어진 일행들과 만난 우리는 ‘SAGO'라는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알고 보니 이 음식점 사장님은 1992년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약 9년간 머물다 귀국한 분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한국말을 거의 잊어먹었다”는 사장님은 아직도 꽤 한국말을 잘 하시는 편이었다. 정수 씨와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힘껏 끌어안고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작별의 인사를 끝으로...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을 믿는다.

저녁 7시, 지금부터 약 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베트남의 전통예술 ‘하노이 수상 인형극’을 감상하였다. 남녀 혼성 4명이 이끄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전통악기 연주와 노래소리에 맞춰 갖가지 인형들이 등장, 매우 리얼하고 현란한 움직임으로 무대를 이끌어갔다. 공연을 마치자 인형을 조종하는 7명의 퍼포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멋진 공연에 힘껏 박수를 보내준 우리 일행은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이제 맡겨놓은 짐을 챙겨 공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3일 동안 여러 모로 수고한 유학생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나눈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하노이 국제공항 출국장에 들어섰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시계를 2시간 앞으로 돌려놓았다. 아침 6시 40분,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을 끝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생각할수록 값지고 인상 깊었던 금번 여행!

몸은 정말 피곤했지만 마음은 너무 평온했다. 그것은 베트남이 내게 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부지런히 살아가면서도 삶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 겉은 유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정신을 소유한 그들, 앞으로 더욱 따스한 친구이자 이웃으로 만나 사랑하며 살리라! 귀한 연수의 기회를 마련해 준 ‘다음세대재단’에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11월 12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하늘이 잔뜩 찌푸려있었다. 3천여개의 섬들이 모여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는 하롱베이 유람을 앞두고 이게 웬 하늘의 심술이란 말인가…. 유람선 타러 가는 길, 아예 비까지 쏟아졌다. 하지만 참 절경은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절경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의 운치와 멋을 즐기기로 마음을 바꿔먹고 유람선에 올랐다. 과연 ‘동양의 3대 절경 중 하나’라는 하롱베이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나라 절경지 중 하나인 거제도에서 2년간 살면서 눈이 상당히 높아진 터였으나, 하롱베이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몇날 며칠 둘러봐도 다 볼 수 없다는 하롱베이를 겨우 4시간 정도 둘러본 우리는 오후 1시 30분 경 하노이로 향했다. 하노이까지는 약 4시간!

물소를 끌고 가는 농부, 논에서 잡초나 해충들을 잡아먹으며 놀고 있는 오리들, 길 옆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는 황소들, 주유하는 동안 바람쐬러 나온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대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가래같이 생긴 농기구로 연신 논물을 퍼내며 일하는 농부들, 공터에서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가이드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계속 이어졌다. 베트남의 가장 큰 명절은 ‘설날’(음력)이고 ‘추석’(음력)은 어린이 축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7월 15일(음력)에는 우리나라 ‘칠월칠석’과 같은 축제가 열리고 이외에도 여러 지역축제가 있다는 이야기,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도로 주행 중 소가 지나가면 차가 서주어야 한다는 이야기, 베트남인들은 살 타는 것도 싫어하고 살을 보여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토지 소유권은 국가에게 있으나 사용권은 사고 팔 수 있으며 사용권 한도가 50년이지만 연장도 가능하다는 이야기, 국가가 쌀을 거의 수매하는데다 물가를 많이 통제하기 때문에 생필품 가격은 잘 오르지 않지만 서비스업의 경우는 통제가 힘들다보니 물가가 높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서비스업에 종사하려고 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이야기, 아파트나 빌라의 매매는 외관 건축만 마무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내장은 집주인이 직접 고르고 꾸며서 마감한다는 이야기, 하롱베이에서 하노이로 가는 길에 있는 ‘박리’라는 도시는 베트남 전통가요의 고장이며, 사람으로 장기를 두는 축제로도 유명하다는 이야기, 고려 고종 13년(1226년) 베트남에서 쫓겨나 3,600여km를 헤매다 서해안 옹진반도의 화산에 뿌리를 내린 후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이 바로 베트남 왕자였으며 이 때문에 화산 이씨는 베트남에 오면 내국인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4시간을 달려 5시 20분경 호텔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여장을 풀고 하노이 시내에 있는 또 다른 오리지널 평민식당을 찾아 식사를 즐긴 후, 호안끼엠 호수로 향했다. 정수 씨와 저녁 8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터였다.

오토바이와 차량,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북적이는 거리였지만 운 좋게도 우리 일행은 정수 씨를 금방 발견했다. 선남 씨는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했고, 대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녹광 씨와 러이 씨가 함께 나와 있었다. 녹광 씨는 그새 턱수염을 길러 하마터면 못 알아볼 만큼 변해있었다. “신짜우, 잘 지냈습니까? 언제 그렇게 수염을 길렀어요? 못 알아볼 뻔 했잖아요. 멋진데요”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 우리들은, 호안끼엠 호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오토바이 택시 등을 불러타고 호숫가를 2바퀴 돈 뒤 2층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녹광 씨는 한국에서 약 5년 동안 일했으며, 러이 씨는 근 4년 정도 일하다가 지난 8월에 함께 귀국한 친구들이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일자리를 잡지 못했으며, 녹광 씨는 자기 집을 짓는 중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고향이 너무 많이 변해있어서 어리둥절했단다. 아직 총각인 러이 씨는 “빨리 결혼해야죠?” 라는 질문에 웃음으로 답했고, 아이가 2명인 녹광 씨는 다행히 가족과 잘 적응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오토바이로 호텔까지 바래다 준 친구들에게 “이제는 여기에서 자리 잡고 열심히 행복하게 사시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시계는 벌써 밤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왼쪽 두 번째가 녹광, 오른쪽 두 번째가 러이 씨)
11월 11일

하노이에서 우리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사람은 괴짜라고 해도 큰 손색이 없는 재미있는 유학생이었다. 상당수 베트남 유학생들은 돈에 구애받는 일 없이 가정부까지 두고 살 정도이며, 구매가치가 높은 탓에 오히려 한국보다 용돈을 더 많이 쓰고 산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베트남 ‘평민’들이 즐겨먹는 길거리 음식을 즐기고 ‘평민’들의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늘 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유람을 즐기는, 그 과정에서 베트남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는 그야말로 평민화(?)된 유학생이었다. “베트남이 좋아서 여기서 살려고 한다”는 이 친구는 “많은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와서 매춘이나 만취소동 등 추태를 보이는가 하면, 기분에 따라 돈을 펑펑 쓰면서 물가도 많이 올려놓는다”며 “이로 인해 최근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에 대한 각종 비자발급에 있어 까다롭게 굴고 있다. 제발 한국인들이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찾아간 우리에게는 베트남을 사랑하고 그 문화에 동화되어 살려는 그가 좋은 선생이 될 듯 했다. 호치민에 이어 하노이에서도 좋은 가이드를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오전 시내관광 일정을 취소하고 결혼이민여성의 가정을 방문하기로 한 우리 일행은 하노이 동쪽 100km에 위치한 항구도시 하이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우리 일행과 가이드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하노이 신시가지에 짓고 있는 20여평 아파트 가격이 10만불 가까운데 비해, 시골에서 올라와 하노이 평민식당에서 일하는 아이들의 초봉은 월 10만동(한화 약 7,000원) 정도이며 경력이 많이 쌓일지라도 50만동(한화 약 33,000원)을 넘지 않는다는 이야기, 가난한 시골여성들이 도시에 올라와 화류계에 취직하는 일도 많다는 이야기, 베트남에서 가장 낙후된 중부는 기후도 나쁘고 자원이나 노동인력도 부족하며 생활기반시설 또한 매우 취약하다는 이야기, 베트남의 노사관계는 사장과 말단직원이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매우 평등하다는 이야기, 대학을 다니거나 뚜렷한 직장이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지만 전쟁 등 유사시에는 온 국민이 전투태세를 갖출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 프랑스나 미국에 대한 적대감정은 거의 없으나 같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면서도 1979년에 영토분쟁을 일으켜 침략했던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적대감정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 언젠가 자신이 한 베트남 대학생에게 베트남전 당시 참전했던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해한다. 당시 너희 나라는 미국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는 힘이 없어서 강대국의 침략전쟁의 들러리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이야기, 베트남은 전쟁을 하도 많이 겪은 탓으로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소비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이야기, 최근에는 공개처형을 자제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약밀수나 집단강간과 같은 반인륜범죄에 대해서는 공개처형을 실시했다는 이야기,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베트남에서 어렵지 않게 북한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 베트남 전통혼례는 매우 복잡하지만 최근 도시에서는 대개 큰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신랑신부가 각 테이블마다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정도로 간소하게 치르고 있다는 이야기...

오후 1시경, 우리 일행은 하이퐁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여기까지 와서 어제 저녁처럼 한국음식을 먹기는 싫다. 보통 사람들이 즐겨찾는 평민식당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하자, 가이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베트남에 오면 베트남식에 적응하려고 하는데 유독 한국인들은 한국식을 고집한다”면서, “내가 안내한 관광객들 가운데 한국식당을 거부하고 베트남 현지식당으로, 그것도 고급현지식이 아닌 오리지널 평민식당으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여러분이 처음”이라며 “운전사 로이 씨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되려 기분이 너무 좋다면서 기꺼이 평민식당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한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베트남 연수일정 중 가장 맛있는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제주도에 시집와 살고 있는 결혼이민여성의 집으로 향했다. 베트남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 여성이 윤명희 간사님에게 “가족들에게 선물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늙은 아버지를 비롯한 언니와 오빠, 동생과 조카 등 많은 가족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방금 밥을 먹고 온 지라 너무 배가 불러서 몇 번이나 그만 내오시라고 했지만, 가족들은 연신 ‘넴’(월남쌈)과 과일 등을 가져왔다. 한국에 간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그리운 딸을 대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마련한 그 음식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하지만 정작 불편했던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딸이 잘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적잖은 다문화가정들이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막연한 기대와 환상 속에 허풍쟁이 중개업자들에게 이끌려 결혼했다가 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실패하듯, 사실 그녀 또한 결혼생활에 실패한 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환대를 받은 우리 일행은 딸에게 전해달라는 물건들 한 보따리를 받은 후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3시경 하롱베이에 일찍 가 봤자 할 일이 없다기에 하이퐁 시내에서 느긋하게 사람구경을 즐기다가 하롱베이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온 우리 일행은 모두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자리에 들었다.
2시간 정도를 날아 하노이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고 호텔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이주노동을 마치고 귀국한 베트남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자주 만났어도 가슴 한 번 뛰지 않더니….’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아래층 커피숍 밖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한 걸음에 달려 내려간 나는 너무 흥분한 탓에 엉뚱한 사람들을 보고 달려들 뻔했다. ‘어, 아니네’ 당황하는 순간, 옆에서 정수 씨(본명은 ‘황틴틴’이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김정수’라는 이름을 사용했음)가 “고 사무국장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이야! 정수 씨...”. 우리 둘은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실이지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반가운 친구였다. 이어서 선남 씨(한국에 있을 때는 ‘정선남’이라는 이름만 사용했으며 이번에 만나서야 진짜 이름을 들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음)가 달려왔다. “와! 선남 씨” 우리는 또다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재회의 감격을 나누었다. 정수 씨 아내인 투이 씨도 수줍게 웃으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잘 지냈어요? 베트남에 오더니 더 예뻐지셨는데요” 하고 농담을 건네며 손을 잡아주었다. 정수 씨와 선남 씨 등은 경남 지역 베트남 이주노동자 교포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정을 쌓아온 친구들이었다.




(필자 옆으로 투이, 정선남, 앞에 V를 한 이가 김정수이다)


일행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다함께 택시 2대를 나누어 타고 가까이에 있는 ‘떠이 호수(서호)’로 향했다. 아름다운 야경과 시원한 바람을 즐기러 나온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눈에 띄었다. 호숫가 한 식당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귀국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오래 떨어졌던 가족과의 재회가 어떠했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등에 대해 그야말로 정겨운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정수 씨는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항구도시 하이퐁에 조선회사를 설립하려고 준비 중인 한국 기업가를 돕고 있었고, 선남 씨는 삼촌과 함께 가스 배달업을 하고 있었다. 한편 정수 씨와 투이 씨는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후 같이 귀국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7년간 가족과 떨어져 홀로 이주노동을 해 온 선남 씨는 2년 전 아버지 병환 때문에 급히 귀국했으나 워낙 오래 떨어져 있던 탓에 아내나 아이들과의 관계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사실 아직도 가족들과 관계가 원만치 않다’는 정수 씨의 귓속말 때문에 더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결국 이주노동으로 인한 오랜 헤어짐이 가족들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거나 병들게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으로 마음 아픈 현실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식당을 나온 우리들은 이틀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호텔 앞에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11월 10일

늦잠 잘 만도 하건만 아침 6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샤워를 한 후 호텔 앞 길 건너편 공원으로 향했다. 이젠 제법 길을 잘 건너는 나 자신을 보고 흠칫 놀랐다. 처음엔 쉴 새 없이 오가는 오토바이를 뚫고 길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벌써 적응했나?’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체육수업을 받는 학생들, 이 곳 학교에는 운동장이 없기 때문에 보통 공원 등지에서 체육을 한단다.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 기체조를 하는 젊은 여성, 요가 비슷한 걸 하고 있는 노인, 우두커니 앉아있는 할머니, 신문 팔러나온 아주머니, 손님을 기다리는 시클로와 오토바이 운전수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가볍게 체조를 하며 나도 잠시 그들 속에서 공원의 일부분이 되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식사를 한 뒤 잠시 남베트남 정권시대의 대통령 관저였던 ‘통일궁’을 들렀던 우리는 당시 남베트남 정권과 미군에 대항해 싸웠던 베트콩들의 지하요새, ‘꾸찌 터널’로 향했다. 가는 도중 대리석으로 보이는 돌로 만든 무덤을 보고 가이드에게 베트남 장례문화에 대해 묻자, “대체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주로 절에서 장례를 치르며 3일장이다. 대부분 매장하고 있지만 조금씩 화장도 늘고 있다”고 한다. 연이어 건물 모양이 특이(전면부가 좁고 측면부가 긴 모양)한 이유에 대해 묻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은 집을 짓기 위해 러시아 공법을 선택했기 때문. 저 공법을 사용하면 매우 빨리 집을 지을 수 있으며, 같은 면적이라도 좀 더 많은 집을 지을 수 있다. 대신 높이에는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천정이 매우 높으며, 이는 통풍에도 도움을 준다”고 설명해주었다. 건축업자다운 명쾌한 설명이었다.

꾸찌에 도착하니 어느새 오후 1시 40분. 15분 정도 비디오를 시청한 후 지하땅굴로 향했다. 가는 도중 갑자기 안내원이 멈춰서서 발로 나뭇잎을 쓸어냈다. “아하!” 전쟁 당시 베트콩들이 드나들었던 지하세계 입구가 나타났다. 눈짐작으로 보건대 가로 약 30~35cm, 세로 약 20~25cm 정도의 크기! ‘과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보란 듯이 안내원이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들어가 보겠느냐?”고 손짓으로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와 허 팀장이 차례로 그 입구에 들어가보았다. 세상에... 좁아도 정말이지 너무 좁았다.



 
( 나무밑둥에 보이는 작은 구멍이 환기구 )

낑낑거리며 입구를 빠져나온 우리는 갖가지 함정을 재현해놓은 전시장을 지나 드디어 동굴로 들어섰다(이 동굴 입구와 내부는 관광객들을 위해 넓혀 놓았다고 한다). 큰 기대와 궁금증을 갖고 들어섰건만 막상 동굴 내부에 들어선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좁은 건 둘째 치고 너무 어두웠다. 겁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어쩌랴! ‘찍새’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보이지도 않는 어둠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그렇게 5초나 지났을까? 안내원과 허성환 팀장이 이미 멀어져있었다. ‘헉! 이런….’ 큰 소리로 앞 사람을 불러댔다. “성환 씨, 어디 있어요? 같이 가요. 성환 씨” “조금만 더 오세요. 조금만요” 잠시 뒤 허 팀장이 손에 잡히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뒤 동굴을 빠져나와 “후아 후아” 심호흡을 하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묻는다. “요번 거는 맛보기였고 진짜는 이번인데, 들어가겠느냐?”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언제 또 들어가 보랴…’ “가 보겠습니다” 용감하게 대답하고 두 번째 동굴을 들어섰다. 약 7~8분 뒤 동굴을 빠져나와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숨이 계속 차올랐다. ‘겨우 10여 분간 잠시 지나온 것도 이 정도로 힘든데, 10여 년간 살면서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베트콩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독립과 자유를 위한 베트콩들의 강인하고 끈질긴 집념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가이드의 설명에 위하면 이 곳의 지질은 석회층이기 때문에 파기는 쉽지만 공기에 노출되면 단단히 굳는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동굴을 파는 데는 그야말로 최적지였던 것이다.





오후 1시경 점심식사를 마치고 호치민 공항으로 향하는 길, 가이드와의 마지막 대화가 이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베트남의 교육수준이나 환경은 어떠하냐”고 질문을 던지자, “베트남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문맹률이 매우 낮다. 배워야 산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다. 직장인들도 일과를 마친 후 야간대학에 다니거나 학원에 영어 등을 배우러 다닌다. 더운 나라여서 사람들이 게으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매우 근면하다. 베트남 사람들의 장점을 3가지 꼽자면 첫째 근면성실하다는 것, 둘째 예의범절을 중시한다는 것, 셋째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기술과 자금만 부족할 뿐 지하자원과 풍부한 인력을 비롯해 이 나라가 가진 잠재력은 매우 크다. 향후 우리나라가 파트너쉽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할 나라이다.
사실 우리 교민들 가운데는 베트남 가정부나 운전수들을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선 안 된다. 교민들의 행동이 민간외교 아닌가?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며 장시간 열변을 토했다. “정말 중요한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노동자들을 마치 하인처럼 함부로 대하는 걸 본다. 말도 얼마나 함부로 하는지 모른다. 말은 못 알아들을지 몰라도 말투와 행동으로 다 느낄 수 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교만해졌는지 모르겠다...”고 공감을 표한 후 “베트남 경제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라고 하는데,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즉각 “그건 바로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도 60~70년대 공무원들은 형편없는 처우에 놓여있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국가재정이 열악하다 보니 베트남 공무원들의 월급수준이 사실 형편없다. 그러다 보니 생활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 나라는 속도위반에 대한 벌금이 매우 무겁다. 하지만 걸리면 대개 뇌물로 무마하는 게 보통이다. 빈부격차도 농업이 80%를 차지하고 있는 산업구조의 취약성 탓이 아닐까 싶다”고 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호치민 공항에 다다랐다.
재빨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곳 한국영사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속된 말로 폼만 잡으려고 하지 실제로 교민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무능하다”며 짧고 굵게 질타했다. 타국살이에 응당 설움과 어려움이 많았을 터, 우리 정부가 얼마나 교민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는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던져본 질문이었다.

호치민 공항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10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셔서 고맙다.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끝으로 가이드와 헤어진 후, 오후 5시 하노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1월 9일

오늘은 베트남의 젖줄 메콩 델타를 찾아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미토’. 가는 도중 엄청난 교통정체에 묶이는 바람에 미토 강 선착장에 도착하기까지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가이드의 계속되는 이야기보따리 덕분에 지루한 줄 몰랐다. 베트남은 해발 0.5M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썰물과 밀물 때마다 물고기들이 드나들어 논이나 개천, 습지 등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고기나 어패류를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선전되는 맥주는 ‘타이거’라는 수입산 맥주이고, 각 지역마다 현지 브랜드 맥주가 있는데 호치민에서는 사이공 비어가 유명하다는 이야기, 전화기 보급률이 10~20% 수준인 상황에서 당연히 핸드폰 보급률이 낮을 수밖에 없으며, 핸드폰을 가진 이들은 대개 회사에서 지원해준 것이라는 이야기, 아이들 수업은 아침 6시 50분에 시작되는데 오전 4시간 수업 후에 집에 돌아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잔 후 오후 1시 30분이나 2시에 오후수업을 한다는 이야기, 예전에는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90년대 말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 베트남 전통의상을 개조해서 만든 아오자이는 프랑스 디자이너가 설계한 것으로 여성의 몸매에 꼭 맞도록 한데다 얇은 실크천으로 만들어져 몸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음흉한 옷이라는 이야기,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긴 머리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가 개방정책 이후에 허락되었다는 이야기, 한류열풍의 발원지인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 되면 주부들이 TV에 빠져 동네에 밥 타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으며, 가족주의 혹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 등을 다룬 한국 드라마의 내용이 베트남 정서에 부합되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베트남 땅값, 집값에 관한 이야기였다. 호치민 시내의 경우 땅값은 무려 평당 2,400만원이며 비싼 곳은 5,0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아파트의 경우 외국 건설사가 짓는 아파트는 평당 300만원이고 현지 건설사가 짓는 아파트는 평당 200만원 정도란다. 가령 베트남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15평~19평짜리 아파트를 사려면 약 3만불 정도를 줘야 하고, 상류층이나 외국인들이 주로 사는 24평~28평 아파트를 사려면 8~9만불 이상이 든다는 계산이다. 그런데 아파트의 질은 한국을 100으로 할 때 40정도 밖에 되지 않게 때문에 ‘결국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집값이 비슷하다’는 게 가이드의 결론이었다. 가이드는 현지에서 건축업을 겸하고 있어 설득력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베트남에서 싼 것은 오직 인건비와 쌀값, 길거리 음식뿐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덧붙였다.







미토 선착장에 도착한 건 오전 11시 30분 경, 보트를 타고 흙탕물처럼 누런 메콩강을 가로질러 토이손(일명 ‘유니콘’) 섬으로 향했다. 강가에는 많은 양식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한다고 한다. 섬에 도착한 우리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열대과일을 맛본 후, 열대과일로 만드는 전통 엿 제조과정도 지켜보고, 까페에 들러 전통음악에도 취해보았다. 드디어 섬 안에 끝없이 연결되어 있는 수로를 따라 본격적인 크루즈가 시작됐다. 그런데 갑자기 웬 빗줄기람... 하지만 걱정 뚝! 우비를 걸친 뒤 도롱이를 쓰자 완벽한 방어자세가 구축되었다. 수로 양 옆은 진흙 속에 자라는 물야자나무들이 담벼락처럼 늘어서 있었는데, 이 물야자나무는 진흙을 빨아들이는 특성을 가진 매우 유용한 나무란다. 10여분간의 크루즈를 마친 후 다시 보트를 타고 미토 선착장으로 도착하니 2시 20분. 현지 특산 요리인 ‘코끼리 귀 생선’을 야채와 함께 쌀종이에 싸 먹고 나니 어느새 오후 3시 30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빈짱사원을 잠시 들러 호치민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 다 되었다. 개별 일정을 가졌던 일행 2명과 호텔에서 합류하여 발마사지를 받은 후 사이공 강 유람선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대로 잠자리에 들기엔 너무 아쉬워 우리 일행은 밤 나들이를 하기로 했고, 벤탄시장 옆 길거리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안주와 사이공 비어를 곁들여 1시간 가량 수다를 떨다가 피곤에 지친 여자들은 이내 호텔로 들어갔고, 나와 허성환 팀장만이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닿은 곳이 또다시 사이공 강가. 선착장에는 강 건너편을 오가는 선박을 기다리는 오토바이족들이 가득했다. 재미있게도 이 배는 밤 11시부터 새벽 3시 40분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 피곤에 지친 허 팀장과 나는 결국 걷기를 포기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셋째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11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급히 호텔로 돌아갔다. 시내에서 가까운 호텔로 옮기게 된 것이다. 오후 1시 호치민 교외에 위치한 한국의 해외투자기업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탓에 시간이 없어 점심은 대충 과자로 때워야 했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길, 베트남 생활 13년차인 가이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베트남에서 가장 싼 건 임금이다. 농산물 값도 싸다. 길거리 음식의 경우 1달러면 2명이 먹을 수 있다. 의류나 모자 등도 매우 싸다. 그러나 나머지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싸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나 자신의 경우 1달 고정생활비가 3,000~4,000달러 정도 든다.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월세와 학비, 학원비, 식생활비, 고용인 급료 등을 충당하자면 그 정도 드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한 가지 직업만 가져선 살 수 없고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해야 한다. 베트남 서민의 경우에는 1달 생활비가 집세, 식비 등을 합쳐 최소 약 100달러 정도 필요하다. 그런데 제조업체 여공들의 임금이 약 60~70달러 정도다. 그러니 싸구려 자취방에서 3~4명씩 함께 생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그렇게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 오토바이들은 어떻게 산 거냐?” “3,000불 정도 하던 오토바이 가격이 최근 중국산 수입으로 600~700달러로 떨어졌다. 그래도 큰 돈임에는 틀림없다. 내 생각엔 개방정책 이후 지하에 묻어놓았던 돈들을 슬금슬금 꺼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보트피플, 이주노동 등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이들로부터 송금된 돈으로 구매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이 곳은 대중교통이 열악하기 때문에 오토바이는 필수적이다. 오토바이 없는 남자는 여자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게 현실이다.”

간간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호치민 교외에 위치한 「ASTRO (SAIGON) Co.,LTD」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30분경.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한국인 지사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광민(?)(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장! 13년째 베트남에 살고 계시단다. 이 회사가 만드는 키플링 캐주얼백이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서울에 있는 키플링코리아는 사무실만 가지고 있을 뿐, 제조는 모두 여기서 이루어지며 전량 수출한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현지 사정을 접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질문 1. 인근에 한국기업이 얼마나 있는가? / 호치민 주변에는 외국투자기업이 매우 많은데 이 중 한국기업은 약 600개 정도이며 대부분 노동집약산업이다. 하노이 쪽은 중공업 분야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질문 2. 회사 근무조건은 어떤가? / 80년대 초반 한국의 봉제공장에서는 근무환경이 열악했을 뿐 아니라 구타 등도 심심찮게 일어났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 곳은 노동의 천국에 가까울 정도로 근무환경이나 복지후생 등이 뛰어나다. 특히 외국기업의 경우 정부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초기에는 극소수 한국기업에서 사소한 구타 등의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외국기업들은 임금이나 근무환경이 뛰어나다. 우리 회사의 경우 7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4시 30분까지 7시간 30분(식사 시간 1시간, 오전 오후 휴식 15분씩) 정도 일하는데, 기본급은 45불에서 숙련도에 따라 100불까지 지급한다. 잔업도 있으나 주 60시간을 넘길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당부 드리고 싶은 점은 이곳의 근로조건을 임금비교만으로 단순히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 노동조건이나 근로환경, 복지후생 등에서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질문 3. 베트남 노동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한국인들보다 우수한 이들이 있다. 사무실 근로자의 80%가 현장에서 뽑아올 정도로 똑똑하다. 문제는 사용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개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의 노동의 질이 높다. 남자들은 소위 의리가 부족한 반면에 여자들은 섬세한데다 의지도 강하다. 처음에는 책임회피 경향이 강했지만 점차 책임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질문 4. 입사경쟁이 심할 것 같다? / 그렇지 않다. 오는 대로 받는다. 오히려 인력 구하기가 어렵고 올해 초부터 인력난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에 대비해 외국기업 등 기업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복지수준이나 임금수준이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볼 때 반경 200Km 정도 떨어진 시골로의 이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질문 5. 혹시 스트라이크가 있는가? / 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대개 식사에 대한 불만이나 잔업에 대한 불만 등이며 스트라이크의 형태는 주로 태업이다.

질문 6. 한국기업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다고 보는가? / 좋지 않다고 본다. 인력개발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저임금을 목적으로 한 이전투자였던지라 현지인들에게는 임금착취를 위한 투자로 비춰지고 있다. 한편 일본기업의 경우는 단호히 자르긴 하지만 평상시에는 다독이는 한편, 한국기업의 경우는 자르진 않지만 속된 말로 갈구기 때문에 인심을 얻기 어려운 스타일이다.

질문 7. 내수를 위한 투자기업도 있는가? / 98%가 수출을 위한 투자기업이다. 내수를 위한 기업은 2% 미만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물론 대우 자동차의 경우는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의 교두보 마련을 위한 투자였지만, 아직은 베트남의 GNP 자체가 매우 낮기 때문에 내수를 위한 투자는 힘든 게 사실이다. 호치민은 이미 98년도에 1,000불을 넘어섰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GNP는 500불 정도이다. 내수확대의 기점은 전체 1,000불 정도에 이를 때라고 예상한다. 다만 부동산 투자개발은 붐이 일고 있다. 외국인이나 내국인 상류층을 겨냥한 건축이 많다. 중국에 투자했던 자금들이 베트남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많다. 중국은 외국기업 등을 단시간에 망하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베트남은 야곰야곰 빼먹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좀도둑은 있어도 대도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질문 8. 노무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 현지인 관리자들을 이용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는 현지인 관리팀과 이사회까지 구성되어 있다. 물론 최종결정은 대표인 내가 하지만 대개 현지인 이사회의 결정을 존중한다. 사실 베트남인들은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노무관리가 가능하다. 초기 한국기업이 노무관리에 실패했던 이유는 독단적으로 끌고 가려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친 후 잠깐 공장을 둘러보았는데 작업공간이 매우 넓고 쾌적한 것에 내심 놀랄 정도였다. 견학을 마친 후 사장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호치민에 있는 전쟁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최근 베트남 정부는 노동집약이 아닌 기술집약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한국기업은 대개 봉제산업일 뿐...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기술산업 분야 기업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상호간 관세가 매우 낮거나 아예 없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다. 대우도 바로 이것을 노리고 투자한 것이다. 중국보다는 투자환경이 매우 좋은 편”이라는 가이드의 부연설명이 곁들여졌다.

전쟁박물관에 도착한 건 오후 3시 20분경. 월남전 참전군인 혹은 직계가족 등 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고 했다. 참혹했던 월남전 당시의 광경을 사진과 모형 등으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후유장애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후대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전시되고 있어, 견학 내내 가슴 한 구석이 아프게 저려왔다.









오후 5시 30분. 호치민 중심거리에 자리한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 일행은 피곤함도 잊은 채 근처 벤탄시장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각종 수공예품과 옷, 가방, 과일, 신발 등이 즐비한 벤탄시장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그러나 그 안에 펼쳐진 시장상인들과 손님들의 활기찬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흥겨웠다.





약 1시간 가량 시장구경을 마친 우리 일행은 여경순 선생님의 소개로 호치민국립대학 사회인문과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김병식 교수님을 만났다. 김 교수님은 정말 친화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교수라고 하면 왠지 거리감을 갖게 마련인데, 이 분은 특유의 유머와 꾸밈없는 행동으로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멋진 분이었다.





“꼭 대접하고 싶다”며 호치민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으로 안내해주신 교수님은 호치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해주었다. “호치민 거주한인들은 약 2만명인데, 이 중 15%가 주재원이나 자영업투자자들이고, 나머지 중 상당수는 일종의 탈출구로써 이곳에 거주”하고 있단다. 한편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다문화가정(국제결혼가정) 문제가 나오자, 김 교수님은 “한국인과 결혼하려는 여성들에게 한국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함과 동시에, 결혼대행업체를 영사관이나 학회 등을 통해 철저히 인증한 후 허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베트남은 가족주의, 형제애, 효도 등 우리나라와 문화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많아 시골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수민족들까지도 한국으로 시집가려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 알려진 대로 베트남 여성들이 순종적인 스타일이라는 인식은 큰 오해임을 강조하셨다. 베트남은 모계사회 경향이 짙으며 이혼율도 미국에 육박할 정도라는 것이다. “종종 베트남에 온 한국인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서 사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인 남편이 꼼짝 못한다”면서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보더라도 여성들은 괜찮지만 남성들은 대개 초라한 행색이지 않으냐?”며 웃으신다.

혹시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마치고 귀환한 이들이 대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보통 서비스 업종, 가령 호텔이나 레스토랑 종업원 등에 근무하며, 일부는 한국기업의 통역자로도 일하는 걸로 안다. 어쨌거나 이주노동에서 귀환한 이들의 모습이 향후 이민자들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들의 귀환이 성공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다녀온 사람들이 한국 좋다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이셨다. 연이어 “향후 베트남에서 전망이 밝은 분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최근 베트남 투자업종이 기계부품제작 등의 경중공업 분야로 바뀌고 있다”면서 “실제 베트남은 석유와 지하자원, 천연자연환경, 인력 등 모든 것이 풍부하다. 국가 전체적으로 8%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고 호치민의 경우는 17%에 달하고 있다. 다만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김 교수님은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관심은 매우 높아지고 있는 데 비해, 영사관조차 한국문화를 알리는 문화원을 설립한다거나 언어를 가르칠 수 있는 정규교육 과정을 마련하지 않고 있어, 결국 무자격 학원들만 우후죽순 격으로 늘고 있다며 한탄하셨다.

그렇게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둘째날 밤이 깊어갔다.
11월 8일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멀리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을 걷어붙이고 창밖에 보이는 호치민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에는 오토바이 행렬로 가득했다. 느긋하게 씻은 후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호텔 문밖을 나섰다. 6시 50분! 호텔 앞을 지나는 오토바이 행렬을 향해 몇 차례 셔터를 누르다가 호텔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 뒤편 작은 골목 시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왠지 걸음이 빨라졌다.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 탓이었을까? 거리 까페의 작은 의자에 앉아 음료수 한 잔을 시켜놓고 느긋하게 신문을 보는 이들도 많고, 거리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베트남의 아침은 한편 활기있고 한편 느긋하게, 그리고 소란스럽게 시작되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맨 꼭대기층으로 향했다. 호치민 시내를 한바퀴 둘러볼 심산이었다. 다행히 날씨도 꽤 맑은 편이었다. 빽빽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볼 때 건물 높이는 대개 3~4층, 간혹 높이 솟아있는 빌딩들은 대개 호텔 같은 건물로 짐작되었다. 잠시 호텔옥상에 마련된 그네의자에 앉아있다가 호텔식당으로 내려갔다. 베트남식 찐만두, 군만두, 튀긴 국수, 과일 등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푸짐히 차려져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시내관광에 나섰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리를 본따 도시계획을 했다고 하여 ‘동양의 파리’로 불리우는 호치민! 먼저 인민청사(시청)로 향했다. 청사 앞에 있는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찰칵. 청사 앞 널찍한 거리가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거리란다. 약 40분 정도 흩어져서 거리구경을 하기로 했다.





허성환 팀장과 함께 기념품 가게, 그림 가게 등을 구경하다가 영화와 음악 CD를 사기 위해 서점으로 들어섰다. 한국에서 일하는 베트남 친구들에게 선물하면 좋을 듯했다. 서툰 영어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영화와 음악 CD, 그리고 전통음악 CD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저것 친절히 골라준 아가씨와 함께 사진을 찍은 후 길을 재촉했다. 도중에 허성환 팀장이 코코넛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길거리 상인을 뿌리치지 못하고 코코넛 한 개에 5만동(1달러=15,000동)을 주고 샀다. 둘이서 같이 맛있게 빨아먹고 돌아오는데, 가이드가 물었다. “얼마 주고 샀느냐?” “5만동을 주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5만동이면 20개는 살 수 있다”고 한다. 어쩌랴? 이미 다 먹은 걸 무를 수도 없고... “엄청 비싼 코코넛 먹었으니 몸에 무지 좋을 것”이라며 농을 건네는 가이드의 말에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정 어두워 속은 사실에 속상해봤자 우리 손해 아닌가? 차라리 깔깔대며 “아마 그 친구 오늘 장사 다 했겠다”고 웃어넘기는 게 현명하리라.

다음 코스는 지어진 지 120년이 넘었다는 중앙우체국. 유서 깊은 우체국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통신환경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탓에 북적이는 걸까? 어쨌거나 국제전화카드를 쓸 수 있는 곳은 우체국뿐이었기에 서둘러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모두들 외출 중인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코스인 노틀담 성당을 향했다. 성당 앞, 눈물을 흘렸다는 성모상 앞에는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11월 7일

아침 6시 10분, 공항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근데 왜 이리 졸리냐, 음냐 음냐...’ 그러다 안내방송에 놀라 눈을 떠보니 벌써 인천공항이었다. 7시 30분! 그래도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공항에는 출국하려는 사람들로 꽤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왔을까?’ 2층에 내려가 잠시 인터넷에 접속해 약속장소를 확인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왜 아무도 안 보이지? 내가 제일 먼저 왔나’ 두리번거리는데 제주도 윤명희 간사님이 뒤에서 툭 친다. 새벽 5시에 도착했단다. 잠시 후 김지혜 과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계셨어요?” 6시 30분에 오신 과장님은 천안의 여경순 선생님, 인천의 정찬향 간사님과 함께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잠시 뒤 도착한 서울 허성환 팀장님 덕분에 꼴찌 도착만 간신히 면한 나. ‘역시 우리 팀은 부지런해...’

그 순간 비보가 전해졌다. 정찬향 간사님이 급작스런 사정으로 못 가시게 됐다는 것! 며칠 전 나주 오수진 선생님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같이 못 가시게 되어 아쉬웠던 터에 정찬향 간사님까지 못 가시게 되다니, 으...! 막강 팀파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우리 팀원들은 슬픈 마음으로 정 간사님을 배웅한 후, 수속대에 줄을 섰다. 그 순간 또 다른 비보가 보였다. 수속대 위에 걸려진 안내장! “10시 25분 비행기가 항공기 접속관계로 오후 4시 50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헉, 그건 우리 비행기였다. 뜨아, 작년 연수팀도 10시간인가 기다렸다더니 올해도...! 어쩌랴?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결심한 우리 팀. 밥도 느긋하게 커피도 느긋하게 이야기도 느긋하게 화장실도 느긋하게...

그렇게 6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호치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먼저 시계를 2시간 앞당겨놓았다. 호치민까지는 약 5시간! 시간 때우는 데 제일 좋은 건 역시 수다 아닐까? 옆에 앉은 허성환 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호치민이다.

왠지 딱딱할 것 같던 입국심사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진행되었고,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오자, 호치민의 후덥지근하고 습한 바람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베트남에 왔음을 실감케 하는 바람이었다.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한국인 가이드에게 도착기념 촬영을 부탁했다. 현지시각 저녁 8시 41분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들이 가장 눈에 띄었다. 신호등도 없는 복잡한 거리에 서로 뒤엉킬만도 하건만 그 좁은 틈새를 능숙하게 쏙쏙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들의 모습이 신기에 가까웠다. 남녀노소 모두 오토바이를 타는 데는 한 마디로 ‘도사’들이었다. 그러나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사고도 엄청나다고 한다. 1달에 약 1,200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그 중 98%가 오토바이 사고라고 한다. 저녁식사는 한정식! 여기까지 와서 한정식을 먹으려니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식사를 대충 해치우고 식당 앞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젊은 친구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스무명 남짓한 남녀가 둘러앉아 떠들고 있기도 했고, 여자친구들끼리 혹은 남자친구들끼리 바람 쐬러 나온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오토바이에 기대앉아 대담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드문 현상이지만 여기서는 매우 일반적이란다. 한편 길가에는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을 상대로 국수나 음료수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무척 많았다. 국수를 먹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또이 춥 헌 반 늑 껌(사진 찍어도 될까요)?” 하고 말을 건네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 한 명이 괜찮다는 손짓을 보낸다. 찰칵! 수줍은 베트남 처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까믄(고맙습니다) 담비엣(또 만나요)”





숙소로 향하는 길!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거리에 넘쳐나는 오토바이 행렬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 오토바이들이 저리 많으냐?”고 가이드에게 묻자 “주거시설이 낙후해 덥고 좁은 방에 있기보다 늦은 밤까지 바람 쐬러 나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호치민에 등록된 인구는 약 500만, 그러나 등록하지 않고 거주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약 800만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데, 호치민 주택시설 수용가능인원은 약 400만명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비좁은 하꼬방살이를 할 수밖에 없으며 기껏해야 잠만 자는 수준이라는 설명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오토바이들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켜나가고 있었다. 더위와 비좁음을 피하기 위해 밤거리를 달리는 이들! 그들은 그렇게 달리면서 가난과 더위를 극복해내고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독특한 여가문화(?)로 자리잡은 듯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 10분경, 호텔 여직원이 우리 일행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투숙객의 여권을 모두 프론트에서 맡아 보관한다는 것. 의아했다. 한 호텔에 며칠 머물 경우 신분증도 없이 돌아다니란 말인가? 연유야 어찌되었건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여권과 등록증을 대부분 회사에 압류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외국인노동자들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나 할까...

이국에서의 첫날 밤! 대충 샤워를 마친 후 피곤한 몸을 뉘었지만 낯설어서였을까? 이런저런 잡념에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자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