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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런 책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소위 실용서라고 불리는 책들이요. ‘이렇게 하면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남을 잘 설득할 수 있다' 그래도 그런 책들에서 힌트를 얻기란 굉장히 힘든 것 같아요. 오히려 선배 직업인들이 미리 헤쳐나간 길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보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손님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인 것 같아요.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지, 추워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 오신 분들만큼은 오신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어요.
이 분은 체구가 굉장히 작으신 분이에요. 성찰적 삶과 함께, 생동하는 현장과 사람만이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두려울 건 없다 김영 프로듀서를 소개합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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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영입니다. 그 당부가 저를 향한 당부이셨군요. 크게 이야기하라는 당부요. 하하. 재단 측에서 이렇게 몰래몰래 동영상을 준비해주셨는지 몰랐어요. ‘저렇게 얘기할 때 손을 많이 썼나? 말이 안 되니까 손을 많이 썼구나. 오늘은 말을 많이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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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리가 제일 어렵죠. 저에 대해서 특별히 말씀드릴 게 없는데요. 영화인이라고 보통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가 영화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고요. 더 나아가서 앞으로는 ‘전천후 영화인'으로 불리고자 해요. 전천후 영화인으로서 세상에 필요한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하다가 죽으려고 생각합니다. (웃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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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해볼생각으로 8mm 영화 만드는 집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조한혜정 선생님과 여러 동인들의 터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면서 여러 모로 점점 깨지게 되었어요. 여러분들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80년대 후반은 암울한 시기였지요. 그시절 나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영화로 담던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그런 축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던 <바리터>라는 곳이 있었어요. 현재 충무로의 변영주 감독, 김소영 교수, 홍효숙 프로그래머 등등. 모두 <바리터> 출신의 영화인들입니다. 그 후 한국영화진흥원 소속의 한국영화아카데미 8기로 들어가서 연출을 전공했어요. 다양한 경험을 쌓다가 94년에 김홍준 감독의 데뷔작인 <장밋빛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기록을 맡았습니다. 연출부 안에서는 스크립터라고도 하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정에는 여자들만 담당한다고 생각해서 충무로에서는 꽃이라고 불리던 일이었습니다. 영화 앞 장면에서 까만색 예쁜 목걸이가 나왔는데 그 다음 장면에서 사라졌다면 그건 옥에 티죠. 스크립터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충무로에 입문을 했습니다. 한동안 방황의 기간이 있다가... 보통 백수라고 하죠. (웃음) 97년부터 여전히 스크립터로서 시나리오가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후반 작업을 도왔어요. 그렇게 90년대 문화의 세기를 마치면서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했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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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도 하고 지내다가 2002년에 김지운 감독 작품이고 오기민(영화사 ‘마술피리'), 오정완(영화사 ‘봄') 두 분의 제작자 밑에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장화홍련>의 실무 프로듀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는 ‘라인 프로듀서'라고도 불리는데요. 1년 반을 그 일을 하고 장화홍련이 6월 13일, 13일의 금요일에 개봉을 했지요. 김지운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한국에서도 공포영화가 잘 될 수 있구나 라는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이공>이라고, 90년대 제가 다녔던 영화아카데미가 20주년을 맞아 개막작을 준비하면서 <이공>이라는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습니다. 작년에 런칭을 하고 얼마 전에 DVD가 나왔어요. <이공>은 스무 편의 단편이 모인 옴니버스 프로젝트구요. 아실만한 감독을 포함해서 20명의 영화아카데미 졸업생 및 동문을 포함한 감독들이 만든 단편 옴니버스영화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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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화판의 프로듀서들 중에는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굉장히 많으세요. 진보적으로 나가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한편으로는 학교 때 룸펜이었던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결정을 못하던 분들이 많았단 생각이 드는 거죠. 뭔가는 하고 싶은데 결정은 못하겠고. 나중에 보니까 할 말이 많았던 거죠. 저도 늘 어디선가 밑으로는 다양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을 거야 생각했던 쪽이었어요. 그래서 <또 하나의 문화>에도 가게 되었던 거구요. 당시만 해도 영화판 사람들을 ‘일탈'이라고 규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로서도 나름대로 도약이었어요. ‘너처럼 규범적인 아이가 어떻게 영화를 할 수 있니?'라고 묻는 사람도 많았고요. 규범적으로 보이는 제 안에 말할 수 없는 열정이 있고 그걸 죽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정, 저 그거밖에 없거든요. 사람들은 몰랐지만 저는 어렴풋이 알았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알아왔던 길 말고 그 길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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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에는 여러 가지 등급이랄까요. 종류가 있습니다. 알기 쉽게 보통 얘기할 때는 제작자, 사장, 대표라고 하지요. 제작자란 말은 그 개념을 말하는 거고요. 제작사의 대표가 하는 일은 우선 어떤 영화가 있을 때 기획의 단계를 맡는 거예요. 이때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취할 수도 있고, 감독의 아이디어가 영화로 되는 경우도 있고요. 많은 성공한 영화는 감독의 기획으로 된 것이 많은데요. 일단 투자사와 얘기를 해본 뒤 결정을 합니다. 일단 그 전에는 좀 주물럭 주물럭 매만져 둬야겠죠. 투자사에서 영화에 투자를 하는데요. 요즘은 한편에 최소 25억 그렇게 가죠. 프로듀서는 이 모든 단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좀 더 실무적으로 와 닿죠. 단편의 경우는 역할 구분이 거의 안 되어 있어요. 지금은 점점 되어가지만, 과거에는 자기 돈 오십 만원 내서 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큰 영화는 오십억씩 쓰잖아요. 그런 경우 감독이 연출에 전념을 할 수 있도록 상황과 재화와 창작성까지 감독과 같이 상의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역할, 그 역할이 프로듀서입니다.
<장화홍련>의 마케팅을 맡은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는 ‘프로듀서는 감독보다 반보 뒤에서 걷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어요. 물론 감독과 함께 제작자에게 의견을 낼 수도 있고, 제작자와는 당연히 사이가 좋아야 하고요. 어떻게 보면 박쥐같겠죠? 항상 그렇게 적절한 위치에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프로듀서다라는 말은 굉장히 와 닿았고요. 김익상 프로듀서 같은 분은 ‘프로듀서는 검과 도 중에서 검이다. 감독이 칼날이 하나밖에 없는 도라고 한다면 프로듀서는 창작적인 부분과 함께 이재(理財)적인 감을 지닌 일종의 검과 같은 역할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경우는 ‘감독이 현장의 아버지라면 프로듀서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셨죠. 제가 현실에서는 오빠와 여동생 같은 관계라고 말하기는 했었죠. (웃음) 그런 것들을 놓고 봤을 때 저는 그냥 노동자로서의 프로듀서였던 것 같아요. 주어진 일과 과제를 해결해 가고 앞으로 밀어붙이는 일을 해왔어요. 물론 프로듀서의 역할은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프로듀서에는 제작부, 제작차장, 부장, 실장, 라인 프로듀서, 슬래쉬 프로듀서, 제작자 이렇게 제작과정을 거쳐서 가는 방법. 마케팅팀의 일원으로 해서 카피 쓰는 것부터 영화 예고, 신문광고 내는 것 등을 맡은 다음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를 알고 영화를 알아서 입문하는 방법도 있어요. 최근에는 마케팅하던 출신들이 영화계에서 각광을 받거든요. 유명한 여성 프로듀서들 가운데는 유명한 마케터 출신이 많습니다. 연출의 고통을 겪은 다음에 제작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저와 비슷한 경우도 다소 있기는 합니다. 제 경우 프로듀서 하기 전에 가장 두려웠던 부분은 돈 관리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제가 돈 관리에 대해 모르지 않을까 했는데 하다보면 점점 알게 되고요. 장점이라 생각했던 부분은, 예전에는 연출을 하면서 영화 만드는 내용에 집중을 했다면 프로듀서가 되고 보니 시야가 굉장히 넓어졌어요. 알게 된 세상에 대해 책임도 느끼게 되고요. 단점은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스탭들에게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는 점이에요. 지금까지는 스탭으로서, 동료로서 같은 편에 서 있다가 프로듀서가 되니까 깎아야 되잖아요. 제작 시스템이라든가 환경이라든가 스탭 처우 개선 문제라든가 정책 입안이라든가 압력 단체의 입장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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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터>에 소속되었을 때,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어서 다큐멘터리 조연출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소개받은 인터뷰였는데 연결해줄 선배가 저를 딱 보시자마자 푸하하하 웃으시면서 “여자였어? 다 좋은데 남자도 데리고 가라. 꼭 남자랑 같이 가” 하는 거예요. 학교는 그런 걸 잘 못 느끼게 했는데 사회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그런 일이 있으니까 굉장히 충격적이더라고요. ‘그건 또 용납할 수가 없지!' 하면서 혼자 갔어요.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국에서도 웃으면서 “남자랑 와”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남자 동료들한테 일자리를 소개하고 남자 셋, 여자 하나가 지원을 했고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됐어요.
첫 질문이 그거였어요. “결혼은 어떻게 할래?” “제가 알아서 합니다.” 건방지게 생각하셨나 봐요. 방송 조연출은 굉장히 바쁘거든요. 머리도 안 감고 짐도 들고 3개월이 지났는데 딱 부르시는 거예요. '네가 오래 못 버티고 나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견디더라. 내 딸이 너처럼 될까 걱정 된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마음이 통하는 상사와 AD로 지냈어요. 그때가 스물다섯, 여섯 그랬죠. 사실 여자 AD라는 게 굉장히 힘든 위치에요. 다들 팔짱 끼고 얼마나 잘 하나 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저는 만약 아침 6시에 촬영이 있다 하면 1시간 일찍 나와서 방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어요. 내가 남을 깨워야지 남이 나를 깨우면 안 되겠죠. ‘성실이 기본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시절이 있었고요. 많은 사람들이 ‘너는 현장에 안 어울려' 했지만 저는 이미 현장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요. 제가 영화인이라고 자연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영화판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성차별 별로 느끼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과 아이디어, 밀어붙이기, 체력으로 - 남는 건 체력 밖에 없습니다 - 나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고민이 많다 보니까 ‘유일한 전략은 싸가지 없게 구는 거다'라고 결론을 냈는데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처럼 때론 이런 식으로 싸가지 없이 구는 게 작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상냥하고 친절하고 온화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식의 전략이 가능한가 생각도 드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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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하게 ‘영화란 나에게 이런 것이다'라는 김영 프로듀서님의 생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현장 이야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주문한 거였고요. ‘공론장'으로서의 영화 만들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영화판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 ‘네트워크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 ‘굉장히 넓고 셀 수 없이 많은 발을 가졌다' 그런 소문들을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든가, 관점에 따라서 사람 대하는 게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사실 카메라 앞에 있는 분들은 잘 기억을 못해요. 대신 스탭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고요. 여자들 사이에서 구인구직이 필요한 경우 문자를 좍 돌립니다. 예를들어 영화제 프로그램 팀장 자리를 구한다라며 조건을 달죠. 성별, 나이 딱 달고 좍 쳐요. 그러면 사방에서 또 문자를 막 쏴줘요. 영화 <엠마>의 주인공 엠마가 자기 머리는 잘 못 깎잖아요. 대신 매치매킹은 잘 시켜주잖아요. 저는 저를 엠마라고 부르는데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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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계획한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기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예전에 누가 이렇게 말해주면 기분 좋았거든요.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보인다면, 그렇게 봐주셨다면 순간순간 충실히 사시고요. 무엇보다 후회하지 않으시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셔야 됩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아주 반대는 안 하셨지만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폄하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거에 굴복하지 마시고요. 좋아하는 일은 안 되도 후회하지 않죠. 좋아하지도 않는 일 하다가 안 되면 정말 후회하겠죠. 먼저 좋아하는 일을 찾은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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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보내잖아요. 저는 꼭 1분 안에, 그리고 끝까지 답장을 합니다. 상대방이 ‘제발 좀 그만 하세요' 그러는데. (웃음) 전 텍스트 세대에요. 문자를 자주 보내고 그것도 꽉 채워서 보냅니다. 근데 그런 제가 토크쇼 전날 밤에 손이 마비가 됐어요. 통증도 없었어요. 문자질, 젓가락질, 펜 쓰는 거 등등 디테일한 작업이 안 됐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마비가 풀리더라고요. 이제 아시겠죠? 건강. 건강은 끝까지 갑니다. 건강만 하면 못하는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동하세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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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부탁드립니다. 오늘 김영 PD님과 함께 한 토크쇼 여덟 번째 자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해요. 어떤 것도 계획된 대로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이 자리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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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0/23 꿈을 찍는 토크쇼 - 김영프로듀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 동안 자기의 영역에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으로 살아오신 선배 직업인들과 조용한 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어봤는데요. 이번에도 저희에게 운 좋은 힌트를 주실만한 이야기 손님을 모셨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일곱 번의 행사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어왔는지 영상으로 준비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영입니다. 그 당부가 저를 향한 당부이셨군요. 크게 이야기하라는 당부요. 하하. 재단 측에서 이렇게 몰래몰래 동영상을 준비해주셨는지 몰랐어요. ‘저렇게 얘기할 때 손을 많이 썼나? 말이 안 되니까 손을 많이 썼구나. 오늘은 말을 많이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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