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소식
  

#모조와르조의 밤 (11월 27일 PM 11:00)

두위씨의 부모님 댁의 발코니에 저녁을 먹은 일행들이 저마다 편안한 자세로 자리잡았다.

나의 일정 동반자인 사카와 그의 친구 두위씨, 두위씨의 동생인 에디씨와 친구인 압둘씨,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콜리스와 나, 이렇게 여섯명의 일행들은 점점 짙어지는 밤기운에 마음을 실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두위씨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기 전에는 말레이시아의 호텔에서 근무를 했었다.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여행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지금은 예전 호텔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를 통해 미국유람선에 취직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


에디씨는 10년가량 한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난 에디씨는 한국에서 낳은 아들 ‘토니’를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부른다. 식물에서 추출하는 파우더의 원재료를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업이 초기단계라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될 지 확신이 없다.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압둘씨는 일행중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인력도입이 중단되면서 입국이 무산되었다. 두명의 아이들의 아버지인 압둘씨는 한국에서의 낭보만을 기다리고 있다.


콜리스는 한국에서 입국한 지 3개월이 조금 넘었다. 맏이인 그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4남매의 가장 역할을 하여야만 했다.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하며 2명의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남동생을 대학에 보냈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한 달이 지나 인도네시아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국이 그리워졌다. 다시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모두들(사업을 시작한 에디씨까지도) 또렷한 한국말로 ‘우리들은 백수’라고 말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죽어서 있는 곳’이라 말을 했다.

이 문제의식이 긍정적인 힘을 가지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고, 고된 노동의 경험만이 아니라 한국의 긍정적인 사회시스템에 대한 경험을 획득한 이들이 그 중심에 서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카의 집 (11월 30일 PM 10:00)

사카는 표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친구다.

사카를 만난 후 5일간 고용허가제 현지실태조사에 대한 준비 작업으로 각 지역의 조력자를 조직하는 일에 함께 동행하며 숨겨진 조력자를 찾아내 소개시켜주고, 설득하는 고된 작업을 사카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의 매순간 사카의 친구들이나 전혀 새로운 인물들과 동행하거나 만나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났지만 둘 만이 이야기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말랑에 있는 사카의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지금까지의 일정들을 정리하기 위해 일정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했다.

표정이 없던 사카의 얼굴에 웃음이 감돈다. 사카가 대뜸 산재를 당했던 자신의 다리를 걷어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다리의 회복상태에 대해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사카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미스터 김’이거나 ‘선생님’이다.

그러나 사카를 나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카를 만나고 나서는 나는 정말 사카가 부르는 호칭처럼 센터의 활동가 ‘미스터 김’이거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선생님’처럼 사카를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카는 친구로 돌아가 이야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일정표를 슬그머니 가방에 집어넣었다.



# 다시 수까르노 - 하따 공항 (12월 4일 PM 8:30)

일행등과 함께 도착했던 수까르노-하따 공항을 홀로 벗어나며 지난밤 첫눈이 내렸다는 한국의 풍경을 잠시 상상해본다. 이미 마음은 일상으로의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인도네시아의 14일은 이주노동자와 이주노동에 대한 구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한꺼풀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다. 또한 다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 문화 속에 소수자로 진입하여 커다란 주류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의 힘을 느낀 순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타문화에 소수자로 진입하여 적응하여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역지사지해볼 수도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밖에 개인적으로 2006년에 기획하고 있는 현지실태조사에 대한 커다란 그림을 그렸다는 성과도 함께 가져올 수 있었다. 준비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연수일정이었다.

일상에 사로잡힌 마음은 다시 한번 조바심을 친다.

은근히 속정 깊게 챙겨주신 김산옥 소장님과 친근한 후배처럼 살갑게 배려해 준 도정환씨, 연수팀 일행들의 뒤치다꺼리며 분위기까지 신경쓰느라 아픈 몸도 돌보지 못한 다음세대 재단의 남은지팀장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해 무척이나 아쉬웠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주신 다음세대 재단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로부드르 (11월 23일 PM 4시 50분)

보로부드르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바세계가 펼쳐 보여진다. 내가 서있는 곳이 열반이라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날(日)수도 헤아리기 어려운 오랜 옛날 이곳에서 수행했을 승려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탑돌이를 하 듯 수십리를 돌고 돌아 이곳 정상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온몸을 감싸는 바람을 맞으며 발아래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였을 터였다. 발아래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을 벗어난 해탈을 꿈꾸었을까, 아니면 고통 받는 중생들의 구제에 안타까워했을까.

세상을 발아래 두면 황제의 그것과 같은 호연지기가 생겨나기도 하였을 것인데, 일체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승려의 마음을 오히려 어지럽히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그 또한 마음공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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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부드르를 내려오려는 중, 안산지역 인도네시아 공동체의 사무국장을 맡았던 ‘로니’씨를 만나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인지라 서로를 알아보기도 어려웠지만 우리일행과의 로니씨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 조우하였다. 로니씨는 고용허가제실태조사를 할때 인도네시아 현지실태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보내준 고마운 조력자였었다.

2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이렇듯 마주하게 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불가의 인연을 실감하는 순간이었고, 보로부드르의 법력이 가져다준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코씨의 차안 (11월 25일 AM 10:30)

조코씨와 부인 카니씨와 함께 솔로 시내에 나가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을 걷고 있는 두 분의 여성을 보고는 차를 세웠다.

“미스터 김, 우리 엄마 언니하고 언니 딸이예요.”

조코씨의 이모와 이종사촌여동생은 차에 올라탔고, 카니씨는 살갑게 그들을 반겼다. 이모님은 덤덤하지만 따뜻하게 카니씨와 조코를 대했다.

조코씨는 마을을 지나 옆의 마을까지 이모님일행을 모셔다주고는 다시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는 동안, 그러니까 이모님이 차에 타고 이야기를 나누고 조코씨는 차를 몰아 이모님일행을 모셔다주는 그 동안의 과정을 바라보는 동안 내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 덤덤하고 일상적인 풍경 속에 갑작스럽고도 새삼스럽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조코씨와 카니씨는 더 이상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이주노동자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의 삶은 그들 삶의 전체의 1/10도 되지 않았다. 비로소 이들부부가 이주노동자라는 추상적 계급을 벗어난 구체적인 생활인으로 느껴졌다. 이주노동을 하는 동안 개별자로 존재했던 이들이 어떤 이의 아들로, 딸로, 누나와 동생으로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자 5년 동안의 고된 이주노동을 마치고 든든하게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짊어져가고 있는 조코씨 부부의 모습이 더더욱 미더워보였다.



#수라바야행 버스 (11월 26일 PM 8:40)

사카를 만나러 가는 길. 조코씨 부부는 처음에 기차를 타고 수라바야로 가라고 권했지만 기차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버스를 타고 수라바야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버스에 올라탄 상인들은 먹을거리며 책등을 권했었다. 특히 책을 권하던 아주머니는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한국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인도네시아 사람이 확실하다며 책을 강매하려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홀로하는 여행의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하던 나는 인도네시아의 무더운 날씨와 좁고 딱딱한 버스좌석에 이내 지쳐버렸다.

처음에 표 값을 흥정하던 사람은 수라바야까지 4시간이면 도착한다 했었지만 6시간이 지나도 수라바야라고 쓰여진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버스 체험을 두고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된다’ 고 하신 김형준 교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신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참고 인내하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지루하고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을 것 같지만, 어떤 때는 그 모든 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지도 하는, 이 버스는 계속 달리고 나는 계속 이곳에 앉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황혼 녘, 버스에 오른 거리의 악사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열려진 버스 뒷문에는 차장이 무표정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7시간 30분에 지난 후 나는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 버스안 (11월 21일 AM 11: 40)

인천공항으로 달리는 버스 안.

시선은 차창 밖을 향하고 있지만 풍경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진 통화 덕에 휴대전화의 배터리는 벌써 바닥났고, 온 신경을 업무에 쏟아내고 나니 마음 짬을 내기도 쉽지 않다.

풍경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잠시나마 이 땅을 벗어나기 위해 2주 가까운 시간을 업무정리에 쏟아 부었지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람사이의 일’인지라 마지막까지 떠나는 발길을 붙잡는다.

모든 일에 떠남을 준비하는 일이 그 일에서 꼭 절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잘 떠나는 일이 새로운 만남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준비라는 생각도 함께 머리 속에 머문다.



# 수까르노 - 하따공항 (11월 21일 PM 8:40)

입국비자를 받기위해 줄을 선 우리일행이 보는 앞에서 한국승객들이 비자를 빨리 받기위해 인도네시아 출입국직원들에게 돈을 건넸다. 그 직원은 돈을 가지고 유유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돈을 건넨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비자를 받고 입국심사대를 향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반응은 같은 듯 달랐다. 추한 한국인의 모습에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인도네시아의 부패지수에 대해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고, 외국에 나와서도 ‘회장님, 사장님’을 찾으며 위계를 찾고, 그 위계의 하위에 있는 사람이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를 하면 ‘회장님, 사장님’으로 불리우는 위계의 상위를 점한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모른 척 체신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촌극 보듯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 등 각자의 개성에 따른 반응의 차이가 느껴졌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정을 함께 하며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차이뿐만 아니라 일행들의 개성차이가 만들어낼 그림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첫날과 둘째날 숙소인 크라운그랜드 호텔



# 호텔로비 (11월 22일 PM 8:30)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한 자카르타에서의 하루일정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호텔방에서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나의 머릿속에는 인도네시아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 아니 인도네시아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하루동안 동행한 한국인 가이드는 한국인 일반의 눈으로 목도한 인도네시아를 우리 앞에 펼쳐보여 주었다. 부패에 찌든 나라, 극심한 빈부의 차가 존재하는 모순된 나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낮은 의식수준의 국민들... 마치 이들에게는 희망이란 존재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발견해야만 했다. 오늘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찾은 희망의 증거를 발견해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이주노동운동의 현장 활동가들인 우리일행이 운동의 희망을 발견해서 돌아가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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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람에게서 연유한다.

비행기로 머나먼 수라바야에서 자카르타까지 배웅을 나온 인도네시아 친구 ‘사카’일행을 호텔로비에서 만났다. 산재로 다리를 다쳐 1년 가까이 치료를 받다가 2005년 겨울에 인도네시아로 돌아온 동갑내기 친구 ‘사카’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나타나 머쓱해 한다. 더욱 단단해진 느낌이다. 사카와 동행한 두위씨와 수나르미씨 또한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입국한 사람들이었다. 굳게 잡는 손아귀에서 따뜻함과 강인함이 전해져 왔다.

쇼파에 앉아 나눈 짧은 대화들. 그러나 그 짧은 만남에서 그들의 삶의 의지를 읽는다.

그리고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각국 이주노동자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자본에 볼모를 잡힌 그들의 꿈들은 많은 경우 허망하게 끝이 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의 횡포에 가장 도전적인 사람들이었다. 유순하고 수동적이지만 가장 도전적인 이주노동이라는 선택을 한 사람들. 그들의 순한 열정과 용기에 항상 고개가 숙여졌었다. 

희망은 사람에게서 연유한다.

사카일행을 보내며 혼란스러운 머리 한 켠에 조심스레 희망을 챙겨 넣는다.

젊은 인도네시아 친구들, 그들이 가진 삶에 대한 도전과 열정이 언제고 그들만큼 젊은 나라 인도네시아를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고 평등한 나라로, 아름다운 열정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는 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런 희망이면 충분하다.

개인사흘 - 마지막 그리고 시작

일을 하다보면 커피를 쉬지 않고 마시게 된다.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습관적으로 마시게 되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거리에서 커피자판기를 볼 수 없던 내게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디만은 여기 온 후 처음으로 한 컵 가득 갖다 준다.   음~  오랜만에 맡아보는 이 향기~ 

이곳사람들은 커피대신 차를 물처럼 마시는 것 같다.  물을 사먹어야 하기에 더욱 그리할 것이다. 

오늘은 인도네시아에서 마지막 아침이다.  그래서 뭔가 기대를 갖게 된다.  오기 전부터 현지교회에서  이곳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바램이 결국 바램으로 만 끝나게 될 것이라는 걸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여기서는 가까운 교회를 간다 해도 서너 시간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그나마 1시간거리의 교회는 성당뿐이란다.  허탈한 마음에 기분이 찹찹하다.  하지만 어찌하랴?   내 중심의 계신이로 인해 홀로 예배할 수밖에...  어쩌면 선교사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디만 가족과 함께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찾았다.  이곳은 쓰나미가 스쳐지나간 앙상한 흔적이 남아있는 바닷가!   아직도 파도가 감을 잡을 수 없이 몰려왔다가는 모래로 애쓰게 만들어 놓은 조각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 가버린다.   쓰나미의 슬픈 기억도 파도와 함께 씻겨나가길...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행사 때 쓸 인도네시아 전통의상과 시장을 보기위해 조금만 쇼핑센터에 들렸다. 계산을 하려는 순간 우르릉 콰쾅! 소리와 함께 계산대 옆에서 불이 튀고 순식간에 전기가 나갔다.  전쟁 아니 테런가?  아님 지진인가?  너무 놀라고 있는데 이번에 약한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소리가 들린다.  여기 와서 처음 보는 비였다.  자주있는 일이기때문에 1시간만 기다리면 그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심상치 않다.  근데 더 신기한 것은 우산을 들고 자전거를 유유히 타고 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끌고 가기도 힘들텐데... 대단한 사람들이다.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비인가?  조금 그치긴 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는다. 

디만은 집에 가서 먹으라고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줬다.  공항에서 사먹으면 비싸다고 바나나와 야자나무열매를 빻아 정성껏 간식을 만들어 주며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 꼭 친정 왔다가 돌아가는 누이를 떠나보내는 것 같다.

디만 가족들과 이별을 하면서 이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도 불구하고 떠나보내기를 아쉬워하며 눈물을 훔치던 이들,  비행기표가 오픈이라 예약 안됐다고 뛰어다니면서 표 끊어주고 자카르타에 가면 국제 비행기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네시아말로 친절하게 적어줬던 디만!  아쉬움과 진한 감동이 물결친다. 

다음에 꼭 만나요. Sampai jum pai lagi!  
 

돌아가면서 예상밖으로 공항세가 많아져 갖고 있던 한국 돈을 루피아로 바꿔도 모자라 얼마는 간신히 옆에 있던 한국분의 도움을 받아 해결은 했다.  짐작을 못했던 나의 불찰이기도 했지만 순간 집으로 못가고 국제미아가 되는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당황했다.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디만이 싸준 것을 먹고 있으니 한 무리의 단체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운동선수인가하고 가만히 살펴보니 운동선수는 아닌 것 같고 혼자 먹기 미안하여 이들도 좋아할 것 같아 나눠주었는데 연수생이란다.

오픈시간 되어 대기장으로 옮겨가니 양쪽 TV와 중간의 계단을 사이로 두 무리로 나눠졌다.   한쪽은 관광이나 사업차 인도네시아를 찾았던 한국 사람들과 일본인일수도 있는 무리 한쪽은 인도네시아의 대학생과 근로자 현지인들...  여기서부터 뭔가 나누어지는듯한 이상야릇한 기운? 

예전에 한국에 왔다가 다시 나간다며 한 연수생이 말을 걸어왔다.  그친구는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였다.  아직 어디로 배정될지는 모르겠다고 하여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명함을 주었다.

드디어 한국 인천공항 도착!  더운 열기도 채 식기 전에 차가운 느낌이 다가온다.  세관통과를 하고 지나가려니 같이 왔던 연수생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직업정신이 어디 가랴?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더니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보니 이들에게 어떻게 써야할지를 가르쳐주거나 알려주는 인솔자가 없다.  그것을 모르는 출입국 직원들은 왜 현지 주소가 없냐고 한국말도 모르는 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으니...  입국서부터 문제에 봉착!   지나가던 아저씨도 안쓰러웠는지 화가 나서 출입국직원에게 뭐라고 한다.   모두 입국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며 내려오니 연수업체의 한국직원과 인도네시아인 직원이 그제야 다가온다.  화가 나서 한마디 했더니 변명만 늘어놓는다.  아~ 또 나의 하루의 시작인가 보다.  끝나는 것이 아닌 출발선에 다시 돌아온 느낌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함께했던 이들인 디만과 그의 가족, 압둘, 남은지, 김기돈, 도정환, 신기환, 요셉 등등(존징은 생략합니다.)  잊지못할 사람들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는 좋은 기회와 추억를 제공해줬던 다음세대재단

비록 처음에 맘먹은 것처럼 되지는 않았어도, 그리고 인도네시아를 다 봤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얘기로 듣고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를 눈으로 직접본 체험을 글로 다 옮겨 담을 수는 없어도  앞으로 나의 삶과 일속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 팀 화이팅!  *^.^*  다음세대재단 화이팅 *^.^*

마지막으로 문화의 다양성을 느끼게 해준 다음세대재단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개인 - 삼일째

오늘은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닭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며  일찍 잠을 깨게 만든다.  이곳은 보통 4시나 5시가 되면 동이 튼다.  시차로 따지면 한국과는 별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다른이들보다 일찍 깨어 집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다들 일찍 일어나서 집주변의 먼지를 깨끗이 쓸어내고 있었다.

아직 산업화가 덜되어 아직까진 생활쓰레기들이 거리에 널려 있지 않았고 나뭇가지를 모와서 태우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마을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온 디만친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어선지   내가 먼저 인사하기 전에 아는척을 하는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만국공통어인 몸짓으로 말하였다.    여기 닭들은 한국 토종 닭과는 다르게 다리가 길었다.   싸움닭출신인가?   돼지고기를 안먹는 이슬람이 대부분이지만 어떤집에는 신기하게도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그것도 두마리나..

이곳사람들은 종교를 한가지 갖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종교의 다양성과 다원주의 사상일까?

아침을 도우려고 주방으로 갔다.  예전 재래식에서 조금 발전하여

시멘트를 높이 쌓은 위에다 타일로 붙여 놓은 싱크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화장실은 수세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본인들은 화장지보다는 수돗물을 이용하여 쓰지만 좌변기를 갖추고 있었다. 

밥을 먹고 집과 연결되어 있는 장모님 댁에서는 기와를 갈고 있었다.  조금 도와주고 나서 우리는 재래시장을 보러갔다.   재래시장에는 여러가지를 팔고 있었는데 그중에 중국제품들도 있었다.

어딜가든 중국제품이 판을친다.

많은 열대과일들과 식품 그리고 생선좌판이 우리네 옛날 시장과 비슷한 모습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남편이 물건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뭐야~ 디만 무거운것을 드는데 들어주세요라고 말하자 부인!  힘쎄요 걱정말란다.  부인역시 괜찮다고 하니 어쩔수 없지만...

돌아오는 길에 식당같은데서 점심을 먹었다.  먹다가 우리 앞에서 먹고 있는 아버지팔에 안겨 있는 애를 보니  털실모자다 으잉~ 이 더운날씨에 나시에다 털모자라니 이해가 안간다.  속으로 웃기지만 웃을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사람들의 멋인데... ㅎㅎㅎ

오늘 오후에는 제주도에서 올때 당부한 루디라는 근로자의 집에 가보기로 했다.   디만네 옆집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1시간 거리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거리는 어림잡을 수가 없다.

루디네는 농촌에 살지만 잘산다고 한다.  도착하니 정말 다른 집보다는 대청이 넓고 소도 송아지랑 포함해서 5마리나 키우고 있었고 그지방사람들에 비해 잘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루디부탁을 받고 왔다고 하니 부모님이 집안곳곳을 보여주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라고 한다. 그리고 점심에 이어 또 식사를 대접받아야만 했다.   반가움의 표시라 생각되어 거절할수 없다.  루디는 법률대학을 나왔다고 졸업증명서까지 갖다 보여준다.  아들만 셋인집에 큰형의 사업을 도와 주던 둘째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처음엔 모두 의아해 했지만 그래도 잘 지낼수 있도록  도와달란부탁을 한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물어본다.  인도네시아 어때요? 라고 좋다라고 하면 여기서 살면 어떻겠냐고 한다.   ㅎㅎㅎ 보낼물건은 우리가 오토바이로 왔기때문에  저녁에 집으로 갖다 주겠다 하여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시간이되자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놀러왔다.   한국말을 1달간 배웠다며 안녕하세요 나는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하며 말을걸어오자 한마디 물어보면 몰라요라며 수줍어 했다.

 여기는 일차산업에 많이 종사하기 때문에 일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돈벌러 가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일까?   귀환한 근로자들 사정도 별차이가 없어 보였다.

디만 역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중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벌어온돈은 집을 짓는데 거의 다써버려서 옛날에 다니던 은행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란다.   그렇지만 비자가 나온다면 한국에 돈벌러 가고 싶어했다.  그래도 그 마을에서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한다.  알뜰살뜰 돈을 잘모와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칭찬이 자자했다.

조금있으니 루디에게 전할 소포를 들고 어머니와 형이 왔다.  그 냄새가 역겨워 아무나 못먹는다는 과일중에 과일 두리안을 갖고서 말이다.

루디와 형은 얼굴이 닮아서 멀리서 봐도 형제임을 알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동생을 잘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고서 돌아갔다.

과일이랑 과자를 싸들고 왔는데 방문했을때 내놓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실례가 될까바 조금 먹었더니 인도네시아 음식을 뭐든 잘 먹는다고 생각했나부다.  아이고~ 오히려 찌고 돌아가면 너무 잘 쉬다 왔다고 몰라보게 될까봐 걱정이다.

개인 이틀째

이곳에서는시차때문에 몇시에 일어나야 할지도 모르겠고 피곤해서인지 푹 잤다.  일어나보니 다들 내가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밥을 먹었다.

 딸혼자 나두고 며칠을 여기 있었다고 압둘은 집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일찍 자카르타에 왔다면 자기집에서도 하룻밤 자고 갔을텐데 아쉬워 한다.  한국에 있는 센터식구들안테도 안부를 전하며

오토바이로 8시간 이상을 간다고 일찍 길을 나섰다.

그리고 오늘의 일정은 디만이 안내했다.

선생님들 모임이 있어 딸이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 같이  프란바난사원(힌두사원)을 향했다.   나중에 안사실이지만 관광객에게는 입장권이 비싸다고 한다.  하지만 디만이 현지인과 같이 계산했기 때문에 나는 그려러니 했던것이다.

이사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은 들을수 없었지만 힌두사원으로 가장 큰 곳이란다.  그 높이도 엄청 높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높이 쌓아 올릴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동한곳은 Kaliurang(칼리우랑)으로 산속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자 절벽으로 둘러싸인곳에  Telogo Muncar라는 폭포가 있었다.  이곳은 휴양지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아 많은 물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제주도에서 보던 천제연폭포와 같다.

내려오다 보니 작은 원숭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크기는 작아도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보고 쫒아오고 있었고 그중에 임신한 원숭이도 볼수 있었다.

휴양지 주변에 파는 음식들을 보니 한국에서 먹는 쌀로 만든 송편 비슷한 것을 파는것이엿다.  속과 맛은 달랐지만 그런대로 먹을만하다.

우리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따로 떨어져 사는 일명 별거를 하고 있는 처남의 처갓댁으로 가기로 했다.   몇달째 얼굴을 못봐서 보려고 길을 나선것이다.

디만도 무슨일이 있을때면 생각을 정리하려고 여기에 와서 몇달을 머문다는 것이다.  산속을 굽이 굽이 돌아 도착하니 정작 본인은 일을 가서 없고 부모님과 그 딸만 있었다.

다른나라에서 온 손님이라고 어머니는 정원에 있는 바나나와 살랏, 람부단등을 따오고 차를 내오며 대접한다.

자식들은 이산 높은곳은 화산이 있기때문에 화산활동때 아들둘이 먼저 갔다고 했다.  무섭지 않냐고 내려와서 사시라해도 평생이곳이 뼈를 묻겠다며 마다하신단다.   주로 커피농사와 소한마리와 과일들을 내다 판다고 한다.  나역시 농촌출신이라 어렸을때 많이 봤던 풍경이라 그리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인지 나보고 여기서 살았으면 한다.    ㅎㅎㅎ

과일을 많이 챙겨주는 이들을 뒤로하고 어둡기 전에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개인첫날

외국인상담을 하며 처음 접했던 인도네시아!   그래서 그런지 반가움이 그 배가 될 수 있겠다.

오기전부터 언제올꺼냐?   몇시에 도착하는지에 대해 꼼꼼히 물어보던 친구 디만,  그리고 귀국전에 퇴직금 문제로 위임을 해놓고

소식을 기다리던 압둘,   본인들의 나라에서 만나니 너무도 반가웠다.  오늘은 부인들과 딸을 데리고 왔다.  오후시간이다보니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가 뭐해서 바닷가에 갔다.

제주에 있을때도 바닷가에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몇번 간적있었는데...자기네 나라도 바닷가가 있다며 보여주는 것이다.

미리 알았으면 수영복을 갖고 오는건데...  아쉽다.

참 오기전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하면 큰섬과 작은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여서 제주도가 섬이기에 비슷한점이 있을것이란 착각을 했었다.   나무들도 활렵수와 수렵수가 공존하고 야자나무 숲이 많이 있지만  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이곳의 바닷가도 검은모래였다. 예전 화산활동을 했던 흔적인 것이다.  제주도에도 같은 모래가 있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다.   

바닷가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지만 바닷물속으로 수영하러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파도가 세서 위험하다고 물에 들어가는것을 꺼려 그저 발만 담그고 있었다.  11월에 바닷가!   지금제주도라면 추워서 겨울바다풍경을 바라보며 폼만 잡고있었을것인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물에 발을 담가봐야지란 생각에 장난기가 돌아  한사람씩 물에 빠트려 버렸다...  서먹한것이 사라지게 하려는 나의 수법인지도 모른다.

한참을 놀다가 그곳에서 관광용 마차인 안동을 탔다.  제주도의 조랑말과 비슷한 말이 끄는 마차로 바닷가를 해안을 따라 한바퀴를 돈다.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며 묶기로 한 디만네 집으로 향했다.

한 2시간가량 가니 야자숲사이길로 들어간다.   밀림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쭉뻗은 길사이로 야자수가 서있고 그 속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아니 정원에 야자수가 있다는 표현이 알맞은것 같다.  그리고 사진에 잠깐 보았던 디만이 살고 있다던 집!

2층집으로 잘 지어져 있었다.   한국오기전부터 건축하기시작했었는데 한국에 오고서 번 돈으로 마무리 했다는것이다.

집을 풀고 나서 그간의 얘기를 들었다.  압둘은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오는 날부터 여기에 묶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족자카르타로 오는걸로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여하튼 8시간이상을 오토바이로 부부가 왔다가 내일 8시간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간단다.  헉!  어떻게 그렇게 탈 수 있을까?  놀랐다.  퇴직금관련하여 자세히 설명해주고 나니 연신 고맙다고 한다.  압둘역시 그렇게 받을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장사를 할거란다.  열심히 해서 잘 살기를 바랄뿐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자꾸 가져온다.  배가불러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데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내가 신기한가 보다.   그동안의  살았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먼저 잠이들었다.

다섯째날

현존하는 왕이 살고 있는 곳 족 자카르타의 술타궁!

들어서는 문입구에서부터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과 술탄궁을 상징하는 큰 문양이 우리를 맞이했다.

안에 들어서자 회의실, 집무실, 현재왕의 결혼할 때까지도 쓰여졌던 연회장등 여러채로 나눠져 있었고 왕이 어렸을 적부터 사용했던 옷가지들과 생활품등 여러가지가 전시되어있었다.

그리고 대대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족보비슷한 가계도가 나무그림으로 상징하여 그려져 있었고 예전 왕과 왕비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어서 인도네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볼수 있었다.

 

그리고 외부인의 출입국 막는 현재왕이 거주하는 곳 !

왕이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은것 같았다.

돌다가보니 한쪽에서 악기연주를 하려는가 보다.  자리를 잡고서 한 10분쯤 기다리니 연주가 시작되었고  한쪽에선 방송용카메라로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이곳 전통악기면서 궁중악기인 가물란 연주란다.  그런데 앞줄 한줄은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인지?  한참있어도 조용하다.  그러다 부르는가 싶더니 그중에 한분이 부르지도 않고 관객앞에서 졸고 있다.   연주자체가 졸립게 만드는건지도 모르겠지만 보는사람이 오히려 마음졸여 진다. 

연주가 길어지는것 같아서 우리는 다음장소로 이동하려고 나왔는데 헉!  태권도복을 입은 어린이들  너무나 반갑다.

이곳에서 태권도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니 타국에서 친구를 만난느낌이다.  그친구들도 한국인을 만나니 반가워서 한 포즈를 잡는다. 

점심식사로  인도네시아식 부페로 맛있게 먹었다.   현지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들 대견스럽다.

그리고 재래시장 체험을 나섰다.

여기저기 물건들이 많았고 수공예가 유명한곳이라 아무래도 수공예제품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상인들이 곤니찌와!를 외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도 여전히 일본 관광객을 선호하는 이들...  그러다 아니라면 바로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바꾸는 사람들 어쩔 수  없는 상인이다.

시장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개인일정에 들어간다.

도정환선생님을 만나려고 솔로에서 8시간 버스를 타고온 친구가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세대재단과 연결되어 만난 유학생! 그녀는 이곳에서 이슬람문화를 연구하고 있단다.  기회가 있다면 여러 가지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흩어지기 전에 우리는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에 대해 간단히 평가를 하였고 헤어지기 아쉽지만 그래도 귀국전에 만나기로 했던 디만씨와 그의 딸 그리고 압둘과 함께  나의 개인일정에 들어갔다.

셋째날

인도네시아에서 불편한 것 중에 하나가 전화였다.  가까스로 통화는 했지만  귀국한 근로자들과의 통화를 하려고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호텔내의 전화도 지역이 다르면 안되고 국제전화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안내하는 신기환씨의 말에 의하면 현지에 와서 중고핸드폰을 사서 쓰다가 다시 팔고 가면 좋다고 했다.  사람들을 봐도 모두가 핸드폰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비도 싸서 그편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정말로 인도네시아에는 한국에서처럼 그 흔한 일반 공중전화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자카르타에서 족자카르타로 이동한다.  이동거리가 차로는 8시간 이상 이다보니 1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 이였지만 우리를 안내했던 신기환씨를 뒤로하고 족자카르타로 향했다.  공항에는 미리 연락을 해두긴 했지만 나를 마중 나온 일행과 족자카르타에서 안내를 맡은 현지인 요셉씨가 나와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일정은 단체일정 때문에 내일 오후에 끝나기에 내일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요셉씨는 꽤 한국말을 잘하였다.  그것도 독학으로 배웠다나...  여하튼 이일을 시작 한지도 4년이 되었다고 한다.

  족자카르타는 자카르타와는 다르게 한산한 느낌이 들었고 공기도 덥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3년 동안 수도로 있었던 곳이지만 호텔 외에는 높은 곳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족자바의 뜻도 안녕! 평화여라는 뜻이란다.  지금도 왕이 살고 있어서 치안이 잘되 있고 역할에 있어서도 주지사급이여서 그 지역을 관할한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시내야경을 보기위해 족자카르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베짝(인력거)를 타고 내일 가볼 술탄궁과 재래시장이 있는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오토바이족들이 매연을 뿜어내며 달리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가죽잠바를 입고 귀국하는 근로자를 보며 의아해 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죽잠바를 걸친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 이런! 우리가 느끼는 추위와 이들이 느끼는 추위가 다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넷째날

  여기 족자바는 화산이 있는 섬이라 흙이 적색토여서 지붕도 모두 붉은색이다.  사투리만도 7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60%가 쌀농사를 짓고 그 외는 수공예와 관광을 주산업으로 한다고 한다.  부르부드르로 가는 길에는 메기양어장이 유명한곳도 있었다.

종교도 다양하여 불교, 유교, 기독교, 무슬렘, 회교, 천주교가 있는데 그 중에 이슬람이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도 3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먼저는 싼띠르라고 불려지며 하루에 기도 5번을 꼭 지키는 독실한 사람들, 둘째는 아방안이라고 종교의식과는 무관한 사람, 그리고 뜨린붕 이들은 종교성이 아주 약하고 그중에는 귀족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가는 길에 문듯사원(불교사리탑)을 거쳐서 갔다.  인상적인 것은 800년 이상 된 밴자민나무가 줄기처럼 보이는 가지를 땅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 지역에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많이 있단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요셉씨안테 노래를 불러달라 하니까 한국노래를 안다며 “사랑해 당신을”이란 노래와 “아리랑” 불렀다. 관광객으로 왔던이가 알려줬다며 구수하게 잘 부른다. 

드디어 세계의 7대 불가사이 하나인 브르부드르 사원!  그 웅장한 자태가 멀리서보면 피라미드의 윗부분만 잘라내고 갖다 놓은 듯 어찌 보면 성 같기도 하나 탑 모양을 한 이곳에 일본 관광객 등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었다.  그 옆을 끼고 부처가 누운 모양을 한 므노레산 일명 와불산이라 부리는 산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머라빗산이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며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수난을 당한 이곳에 유일하게 훼손이 안된 부처상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중앙에 있는 부처의 코를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다들 손을 뻗어 만져보는 것 이였다.  한층한층 올라가 한바퀴 돌고 앉아 있으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씻어낸다.  다른 한쪽의 무리도 앞을 향해 모두 앉아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어쩌면 올라 올 때의 땀을 다 씻어 내리고 천상위에서 속세를 바라보는 것 같아 이 높은 곳에다 사원을 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앉아있노라니 우연히 한국의 노동자로 갔다 온 로니씨와 에디씨 그리고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 갔다 왔다라고 말만해도 참 반가웠는데 그는 얼마 전에도 안산에 갔다 왔다며 현재는 인도네시아에서 NGO를 만들어 외국인고용허가제와 귀환한 노동자를 위한 정착 프로그램 및 정책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관광지 어디든 상인들이 많이 쫒아 다닌다. 한국말로 2개에 만원이라고 외치는 상인들!   한국관광객이 그 만큼 많이 오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은세공을 하는 곳을 들렸다.  역시 수공예솜씨를 알아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식당... 현지식도 맛있었는데 오히려 한국과는 다른 맛으로 인해 조금은 실망...

이틀째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아침!  여기저기 창문 너머로 출근을 서두르는 자동차들과 수많은 오토바이들 그리고 건너편 너머로는 수십명 아니 백여명이상 사람들이 사복차림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것이 보인다.  그러더니 이내 음악과 함께 앞서 인도하는 사람을 따라 체조를 30분 이상을 하는 것이였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인상이 남았다.  어떤회사일까 궁금했는데 후에 경찰서라는 것을 알았다.

아침식사는 호텔 식당 인도네시아식 부페로 시작했다.

그리고  가이드의 인도를 받으며 민속촌인 따마미니로 향했다.

예정에 있던 독립기념관은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다보면 시간도 많이 들고 개방시간이 따로 있어 굳이 구경하지 않더라도 멀리서 보는정도로 아쉬움을 달랬다.

따마미니에 도착해보니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하루는 어림도 없고 며칠을 잡고 와야 한다고 한다 여하튼 이중에 자동차로 몇군데를 돌아보기로 했다.

인도네시아가 큰섬들과 작은섬들로 이어진 만큼 동서남북이 다르고 섬과 섬이 다른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수 있었고 그중에 식인종이 살던 섬도 있다는 것이다.   관람하다보니  넓은 인공 호수가 나타났다.   물 중간 중간 넓은것과 작은 것이 보였는데 그것은 인도네시아 지도를 파놓은 것이었다.  이 호숫주변엔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관람할때마다 카메라가 있으면 1,000루피아를 지불해야 했다.

점심을 먹기위해 우리는 인도네시아 퓨전식당으로 이동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메우고 있었고 여기저기 담배를 피워대는 사람들 이곳 사람들은  담배를 많이 피우는것 같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커피보다는 아이르(생수)와 테보(홍차비슷)라는 차를 즐겨 마셨다.

우리나라의 볶음밥, 오뎅, 닭국수, 만두 비슷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물건값을 높이 부르기 때문에 반이상 아니 무조건 갂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먼저 도매시장으로 향했다.  1층에 들어서니 신발가게가 먼저 보인다.  더운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츠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 단단해보이거나 꼼꼼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의류매장으로 향하니 다양한 색상의 전통의상과 옷감들과 티와 청바지등 우리와 별다르지 않은 점포들

평일이라 그런지 1층은 사람들이 조금 있었고 그외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구경하면 지나가다보면 제펜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있었다 그럴때면 NO, KOREA라고 외치고 지나갔다.

여기의 물건값은 보통 15,000루피아에서 50,000루피아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물건은 다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싼 백화점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느낌이 달랐다.   건물과 건물사이가 이어져 있는데 들어가는 매장은 화장품을 파는매장이였고 지하가 식품코너 2층이 의류매장 3층이 관광상품들  가격들도 앞서 구경했던 도매쇼핑센터와는 확연히 틀렸다.

5만루피아에서 몇10만루피아를 넘는것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식품매장에서 몇가지 과일들을 사고 저녁식사후에 먹기로 하고 도시주변에 젊은이 들이 많이 모이는곳 우리같으면 포장마차와 같은 곳으로 가서 닭불고기에 소스를 곁들인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돌아왔다.